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문단 편집) === 1812년 원정의 파멸과 프로이센의 참전 === 1812년 12월 5일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간 후 그랑다르메는 모랄빵 상태에 빠져 근위대원들까지도 탈영하기 시작했다. 12월 6일의 기온은 영하 38도에 달했는데 스마르혼에서 [[빌뉴스|빌나]]로 퇴각하는 와중에만 그랑다르메는 2만 명을 잃었고 12월 8일 빌나에 들어서서는 빌나를 철저히 약탈했다. 당시 빌나에는 10만 명이 40일간 먹을 식량이 준비된 상태였으나 이미 굶주리다 못해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 구워먹고 피를 뽑아 마시며 후퇴하던 프랑스 군대에게 질서 따윈 없었다. 지휘관 [[조아킴 뮈라]]도 마음이 저 멀리 간 채 [[루이니콜라 다부]]에게 자신들이 섬기고 있던 건 한낱 괴물이었다고 황제를 비난하기까지 했고[* 이에 다부는 뮈라에게 당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괴물 덕 아니냐고 말했다.] 미친듯이 약탈하고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자느라 또 죽어가던 프랑스 군대는 [[카자크]] 기병대가 도시 밖에 나타나자 빌나를 최소한 8일간 지키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무시하고 24시간 만에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뮈라는 2만 명이나 되는 부상병을 카자크 기병대의 장난감으로 던져줬고 카자크 기병대는 당연히 포로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 소식을 들은 (가장 먼저 도망쳤던) 나폴레옹은 분노해 날뛰었다. 12월 10일 시점에서 뮈라의 수중엔 겨우 1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달아나면서 대포와 돈궤까지 버렸으며 뮈라만이 마지못해 독수리 깃봉을 챙겼다. [[카우나스|코브노]]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군대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은 7천 명에 불과했다. 12월 13일에서 14일에 걸쳐 뮈라는 후위대와 합류하여 추격하는 러시아군과 싸웠고 마지막으로 네 원수가 지휘하는 병력이 네만강을 도하한 후 교량을 불태웠다. 이것으로 1812년 전역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살아남은 프랑스 군대는 독일 전역에 흩어졌다. 슈바르첸베르크와 레니에르가 지휘하는 9만 명의 독일 생존자들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돌아갔다.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고 추격하던 러시아군은 일단 국경에서 추격을 멈추고 프로이센과 1812년 12월 31일 타우로겐 회의의 결과에 따라 프랑스군 10군단 마크도날에게서 이탈한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병력을 포섭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사후 추인을 전제로 하여 강화를 맺고 반 프랑스 전선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사실 이 와중에 [[미하일 쿠투조프]]와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확전에 대한 의견차로 불화가 심했는데 쿠투조프의 의견에 따르면 국경 밖에서 싸우는 것은 확률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지쳤으니 우선 쉬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친 것. 그래서 쿠투조프의 의견을 늙은이의 헛소리로 치부한 황제는 격노하여 쿠투조프를 경질시키려 했으나 마침 건강이 악화된 쿠투조프가 진짜 은퇴했고, 황제는 기뻐하며 후임자로 비트겐슈타인을 임명한다. 어쨌거나 타우로겐 회의의 결과에 독일 전역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브란덴부르크에서 전쟁을 외치기 시작했고 주저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813년 2월 28일 차르와 동맹을 결정, 타우로겐 회의의 결과에 비준하여 프랑스에 대한 성전을 선포했다. 3월 13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 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에게 1806년 이전의 영토를 수복할 것을 보장하고[* 대신 라인강 좌안 대토보상으로 영국의 [[동군연합]] 하노버를 프랑스에게서 받는 건 포기하고 러시아에게 바르샤바 등 폴란드를 양보한다는 조건. 이 때문에 [[빈 회의]]에서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유럽의 평화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8만 명의 프로이센 군대가 전선에 투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